영원한 시간과 마주하다: 바티칸 박물관 답사기

영원한 시간과 마주하다: 바티칸 박물관 답사기


​로마라는 도시가 품은 수많은 기적 중에서도, 바티칸 시국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은 단연 인류 문명과 예술의 정점이 모여 있는 거대한 보물창고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교황들이 수집하고 지켜온 인류의 유산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나선 길,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미술관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을 나서는 순간, 내 안에는 단순한 감탄을 넘어선 깊은 전율과 결코 쉽게 가시지 않을 긴 여운이 가득 차올랐다.


​1. 바티칸 박물관의 시작: 흙 속에서 피어난 예술의 전당



​바티칸 박물관의 역사는 흥미롭게도 단 한 점의 조각상에서 비롯되었다. 1506년 1월,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 위치한 한 포도밭에서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조각 하나가 발굴된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라오콘 군상>이다. 이 위대한 발견 소식을 들은 당시 교황 율리오 2세는 즉시 궁정 건축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청년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현장으로 보냈다.
​그들은 흙 속에서 드러난 조각을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고, 교황은 이 조각을 즉시 사들여 바티칸의 벨베데레 정원에 전시했다. 대중에게 이 유물이 공개된 1506년의 그 날이 바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바티칸 박물관의 탄생 순간이다. 한 점의 명작을 보존하고 찬미하고자 했던 열망이 500년이 지난 오늘날, 매년 수백만 명의 여행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거대한 예술의 성지가 된 것이다.


​2. 고통의 극치와 육체의 완성: 벨베데레의 뜰에서 만난 걸작들



​미술관 내부의 화려한 회랑들을 지나 마침내 고대 조각들이 숨 쉬는 '벨베데레 정원(Cortile del Belvedere)'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두 명작, <라오콘 군상>과 <벨베데레 토루소>를 대면했다.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이 그리스군의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이는 것을 반대하자, 그리스를 돕던 신들이 거대한 바다뱀 두 마리를 보내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숨 막혀 죽게 만드는 비극적인 순간을 포착한 조각이다.

​실물로 마주한 라오콘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뱀에게 물려 팽팽하게 긴장된 허벅지 근육, 고통으로 비틀린 가슴팍, 그리고 하늘을 원망하며 울부짖는 절망적인 표정은 대리석이라는 차가운 돌을 깎아 만들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미술의 극치라고 평가받는 이 작품 앞에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실감하며 한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이어서 마주한 작품은 머리와 팔다리가 모두 소실되고 오직 몸통(토루소)만 남은 <벨베데레 토루소(Torso del Belvedere)>였다. 이 볼품없어 보일 수도 있는 파손된 조각상이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는 이 조각상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교황이 그에게 잃어버린 팔다리를 덧붙여 복원해 달라고 요청하자, 미켈란젤로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그 자체로 완벽한 예술이다. 감히 내가 여기에 손을 댈 수 없다. 나는 이 조각상에게서 예술을 배우는 제자일 뿐이다."

​실제로 토루소의 뒤틀린 등 근육과 웅크린 허벅지의 역동성은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들에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완벽하게 보존된 것보다, 오히려 비어 있는 공간이 주는 상상력과 꿈틀거리는 생동감이 예술적 영혼을 더 강하게 자극한다는 역설을 이 쪼개진 대리석 한 덩이가 웅변하고 있었다.


​3. 천상의 문을 열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숨 가쁘게 수많은 방을 지나며 마침내 이 답사기의 종착지이자 바티칸 최고의 성소인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에 들어섰다. 엄숙한 침묵이 흐르는 성당 내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 순간 나도 모르게 신음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젊은 날의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오 2세의 명령을 받아 4년 동안 비계 위에 누워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고독하게 그려 나간 천장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였다.

​그 유명한 <아담의 창조>에서 하느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긴장감을 담고 있었다. 인류의 탄생, 낙원 추방, 노아의 방주 등 구약성경의 서사들이 천장 가득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목에서 신물이 넘어오고 눈에 물감이 떨어져 시력을 잃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거장의 광기에 가까운 예술혼이 성당 천장에 그대로 얼룩져 있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신을 향한 필멸자 인간의 가장 숭고한 응답이었다.

​천장화가 완성되고 약 20여 년이 지난 후, 60대의 노장이 된 미켈란젤로가 다시 이 성당으로 돌아와 제단 벽면에 그린 작품이 바로 <최후의 심판(Il Giudizio Universale)>이다.

​벽면 전체를 푸른 라피스 라줄리 빛깔로 물들인 이 거대한 벽화는 천국의 기쁨과 지옥의 공포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중앙에서 준엄하게 손을 들어 심판을 내리는 젊고 건장한 예수의 모습은 자비로운 구원자라기보다 두려운 신성에 가깝다. 그 주변으로 구원받아 하늘로 올라가는 영혼들의 안도와, 지옥의 강을 건너 사탄의 손에 이끌려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자들의 절규가 생생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순교자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인간의 가죽 속에 묘사된 미켈란젤로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거장은 스스로를 껍데기만 남은 죄인으로 묘사하며 신 앞에서 극도의 겸손과 두려움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 압도적인 규모와 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해부학적 묘사 앞에 서니, 마치 나 자신이 심판대 앞에 선 듯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4. 답사를 마치며: 마음속에 멈추지 않는 파동을 남기다



​하루 온종일 예술의 파도에 휩쓸려 다닌 듯한 답사를 마치고 박물관의 나선형 계단을 내려오면서, 머릿속은 온통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 세기 전 살다 간 예술가들이 남긴 영혼의 흔적들이 오늘날 먼 동방의 나라에서 온 이방인의 마음을 이토록 세차게 흔들어 놓을 수 있다니, 예술의 힘이란 참으로 위대하고도 신비롭다.

​바티칸 박물관은 단순히 고대와 르네상스의 유물을 모아둔 전시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이상, 영원을 향한 예술가들의 처절한 날갯짓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는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

​라오콘의 비명 소리, 벨베데레 토루소의 역동적인 등 근육, 그리고 시스티나 성당을 가득 채운 거룩한 푸른 빛의 잔영은 박물관 문을 나선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내 눈앞에 선연히 아른거린다. 바티칸이 내게 남긴 깊은 여운은 아마도 내 평생의 삶 속에서 문득문득 살아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질 것이다.

벨베데레 토루소

라오콘 군상


천지창조

바티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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