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이유 궁전을 가다

 


프랑스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 가운데 하나는 단연 베르사이유 궁전입다. 파리 중심부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약 1시간 정도 이동하자 웅장한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습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쳤고, 멀리서도 황금빛 대문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화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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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베르사이유 궁전은 원래 루이 13세의 작은 사냥용 별장이었지만, 루이 14세가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유럽 최고의 왕궁으로 완성한 곳입니다.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공간답게 궁전 곳곳에는 당시 프랑스 왕실의 막강한 권력과 부를 보여주는 화려한 장식들이 가득했습다.

내부


궁전 내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높은 천장과 금박 장식, 정교한 조각들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방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당시 왕과 왕비가 실제 생활했던 공간을 둘러보며 프랑스 왕실의 생활상을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역시 '거울의 방'이다. 길이 약 70m에 달하는 긴 복도 양쪽으로 수백 개의 거울이 설치되어 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반사되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다. 이곳에서는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합니다. 화려한 공간이 세계사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정원


궁전을 둘러본 뒤에는 넓은 정원으로 향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진 프랑스식 정원은 완벽한 좌우 대칭과 정교한 조경으로 유명합니다. 분수와 조각상, 아름답게 손질된 나무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작은 운하에서는 보트를 타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고, 곳곳에서 가족과 연인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별궁과 프티 트리아농까지 함께 둘러보기를 추천합니다. 화려한 본궁과는 또 다른 소박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왕비가 자연 속에서 휴식을 즐기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당시의 생활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화려함에 숨겨진 역사


베르사이유 궁전은 단순히 아름다운 관광지가 아니라 프랑스 역사와 문화, 예술이 모두 담겨 있는 거대한 박물관과 같은 공간입니다. 화려함 뒤에 숨겨진 왕실의 이야기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역사까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어 더욱 뜻깊은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파리를 여행한다면 하루 정도는 꼭 시간을 내어 베르사이유 궁전을 방문해 보기를 추천합니다. 웅장한 건축과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수백 년의 역사가 어우러진 이곳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마주하는 감동이 전혀 다릅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원래는 작은 사냥용 별장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가 1620년대에 이곳에 작은 사냥용 별장을 만들면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베르사유는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지역이었고, 왕에게는 사냥을 즐기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인 루이 14세가 이곳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1661년부터 대규모 공사가 시작됐고, 건축가 루이 르 보, 쥘 아르두앵 망사르, 화가 샤를 르 브룅, 정원사 앙드레 르 노트르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동원됐습니다. 루이 14세가 죽은 1715년까지 무려 50년 이상 공사가 계속됐습니다. 


루이 14세가 왜 베르사유를 이렇게 크게 만들었을까?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왕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루이 14세는 흔히 '태양왕'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국왕의 권력을 귀족보다 위에 두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습니다.
1682년에는 아예 프랑스의 궁정과 정부를 베르사유로 옮겼습니다. 왕족뿐만 아니라 귀족과 주요 행정기관까지 베르사유에 모이게 되면서 베르사유는 단순한 왕궁이 아니라 프랑스 정치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습니다. 왕이 파리에 머물면서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베르사유라는 거대한 궁전에 귀족들을 모아 놓고 왕의 일상생활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왕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했습니다. 왕의 기상과 취침, 식사, 사냥, 미사 같은 일상적인 행동조차 궁정 의식의 일부가 됐습니다. 그래서 베르사유는 화려한 궁전인 동시에 귀족들을 왕의 주변에 묶어두는 정치적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거울의 방은 베르사유의 상징


베르사유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를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거울의 방(Hall of Mirrors)입니다. 길이가 약 73m, 폭 12.3m, 높이 10.5m에 달하는 거대한 회랑입니다. 한쪽에는 17개의 창문이 있고 반대편에는 17개의 아치형 공간에 거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모두 합쳐 357개의 거울이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이 거울은 단순히 궁전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장식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거울은 매우 비싼 사치품이었고, 특히 베네치아가 거울 제조 기술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대규모 거울을 제작해 궁전에 설치했다는 것은 프랑스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과시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천장에는 샤를 르 브룅이 그린 거대한 그림들이 있고, 루이 14세의 군사적·외교적 성공을 묘사했습니다. 즉 거울의 방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당시 유럽의 외교관들에게는 '프랑스 왕권의 힘을 직접 체험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베르사유 정원도 궁전만큼 중요하다


베르사유를 방문하면 건물만 보고 돌아오면 아쉽습니다. 궁전 뒤편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정원은 루이 14세가 궁전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던 공간입니다. 정원 설계의 핵심 인물은 앙드레 르 노트르였습니다. 그는 나무와 산책로, 연못, 분수 등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해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프랑스식 정원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궁전에서 바라보면 시선이 멀리까지 직선으로 뻗어 나갑니다. 이른바 그랑드 퍼스펙티브(Grande Perspective)입니다. 르 노트르는 기존 지형을 활용하면서 대운하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시각적 축을 만들었습니다. 베르사유 정원의 공사는 약 40년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그래서 베르사유는 사실상 궁전 + 정원 + 운하 + 숲 + 별궁이 결합된 거대한 왕실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왕의 침실에서도 정치가 이루어졌다


베르사유를 이해할 때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왕의 사생활 자체가 공개적인 의식이었다는 점입니다. 왕의 침실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는 '기상 의식'과 밤에 잠자리에 드는 '취침 의식'이 열렸습니다. 왕이 일어나는 모습을 귀족들이 지켜보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왕에게 접근했습니다. 왕의 식사 역시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왕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가, 누가 왕의 식사를 지켜볼 수 있는가 자체가 궁정사회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베르사유의 화려함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신분질서를 눈으로 보여주는 장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베르사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베르사유에서 생활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해 특히 유명한 곳이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과 '왕비의 촌락(Hameau de la Reine)'입니다.  프티 트리아농은 원래 루이 15세 시대에 만들어진 별궁이고,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개인적인 공간으로 사용했습니다. 궁전의 엄격한 궁정생활에서 벗어나 비교적 사적인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에는 농촌 마을을 흉내 낸 건물과 목가적인 공간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상당히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왕실의 화려한 생활과 서민들의 생활 사이의 큰 격차가 존재했습니다.


베르사유에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됐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베르사유의 운명도 바뀌었습니다. 1789년 6월에는 프랑스 역사에서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 일어났습니다. 삼부회에서 평민 대표들을 중심으로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헌법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파리 시민들이 베르사유로 행진했습니다.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로 이동했고, 이후 베르사유는 다시는 프랑스 왕실의 공식 거주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UNESCO 역시 1789년 10월 6일 베르사유에서 왕과 왕비가 파리로 이동하면서 권력의 중심이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고 설명합니다.


왕궁에서 프랑스 역사박물관으로


왕정이 무너진 뒤 베르사유가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은 아닙니다. 19세기에는 새로운 역할이 부여됐습니다. 1837년 루이 필리프 왕의 명령으로 프랑스 역사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프랑스 역사와 관련된 회화와 조각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베르사유 궁전에는 약 2,300개의 방, 약 63,154㎡에 이르는 공간이 있습니다. 궁전뿐 아니라 그랑 트리아농, 프티 트리아농, 정원과 공원 등을 모두 포함하면 그 규모는 훨씬 더 커집니다.


의외로 중요한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는 프랑스 왕정시대에만 중요한 장소였던 것도 아닙니다. 1919년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한 베르사유 조약이 바로 거울의 방에서 체결됐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871년에도 이곳에서 독일 제국의 성립과 관련된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베르사유는
프랑스 절대왕정 → 프랑스 혁명 → 왕정 붕괴 → 근대 프랑스 역사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라는 서로 다른 시대의 역사가 겹쳐 있는 장소입니다.


 베르사유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관점


베르사유를 단순히 "엄청나게 화려한 프랑스 왕궁"으로 보면 절반밖에 보지 못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베르사유의 진짜 핵심은 권력을 건축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궁전의 거대한 규모, 끝없이 뻗은 정원, 수백 개의 거울, 천장화, 왕의 침실과 의식, 궁정 귀족들의 생활까지 모두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왕이다."
루이 14세는 그 메시지를 말로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베르사유 전체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화려한 궁전은 프랑스 혁명 이후 왕정의 종말을 상징하는 장소가 됐습니다.
현재 베르사유 궁전과 공원은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으며, 유네스코는 베르사유가 17~18세기 유럽의 왕실 건축과 정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


베르사이유 궁전 내부



베르사이유 궁전 내부

베르사이유 궁전 내부


사진출처  : 직접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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